제주MBC

검색

1947년② '동광리 하곡수매 반대'

김찬년 기자 입력 2021-04-05 20:10:00 수정 2021-04-05 20:10:00 조회수 0

◀ANC▶



1948년 4월 3일 일어난

무장봉기의 발단이 되는

1년 전 제주 상황을 조명하는 기획뉴스,

오늘은 두 번째로

동광리 하곡수매반대운동을 살펴봅니다.



미군정은 1947년 여름

연 이은 흉년에도

전국 곡물수집량의 20%를

제주도에 할당하면서

중산간 마을 곳곳에서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김찬년 기자입니다.



◀END▶

◀VCR▶

(CG)

"1947년 10월

징역 6개월과 10개월을 각각 선고 받은

문성언 씨와 강석주 씨의 판결문.



4.3 무장봉기 8개월 전인

1947년 8월,

동광리에서 하곡수집 설명회가 열렸습니다.



주민들은 할당량이 많다며

수집량을 줄여달랐고 청원했지만,

군청 직원이 청원하던 주민을 폭행하면서

마을 청년들이

직원들을 집단 폭행하는

사태로까지 번졌습니다."



미군정은 사태 원인을 파악하기 보다

다음 날 경찰 100여 명을 마을로 보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쳤고,

마을 청년들은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거나,

경찰에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INT▶문법윤/문성보 수형인 조카

"내놓을 곡식이 없으니까 (청원을) 하는 거 아니에요. 곡식이 있으면 협조라도 할 수 있지만 우리 동네는 보리가 안 됐기 때문에 협상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1947년 여름 미군정은

전국적으로 71만 석의 하곡수집을 했는데,

제주도에 전국의 23%인

만 7천석을 할당했습니다.



(CG)신문

"당시 신문 자료를 보면

12월 전국적으로 할당량의 84.5%가 수집됐지만

제주도는 11%에 불과해

하곡 수집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INT▶양동윤/제주4.3도민연대 대표

"이 당시 일반재판을 보면 실형도 있지만

벌금형 같은 것도 있어요. 당시 경제력으로 봤을 때 밭을 팔아야 되는, 소를 팔아야 되는 상황이거든요. 이거는 좀 심하게 말하면 생명과 같은 재산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무리한 하곡수집 정책이

일제 시대 식량을 강제로 수탈했던

공출제도로 인식되며

주민들의 심리적인 반발은 점차 거세졌습니다.



여기에 다른지역 출신들로 채워진

경찰들의 무분별한 검거가 지속되면서

1947년 여름 하곡수매반대 운동을 기점으로

제주섬 곳곳에서 주민과 군경 사이

폭력사태가 잇따랐습니다.



MBC뉴스 김찬년입니다.

Copyright © Jeju Munhwa Broadcasting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

김찬년
김찬년 mbcjeju@gmail.com

취재부장
연락처 064-740-2521

여러분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해 주세요.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