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앵 커 ▶
제주4·3 당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군사재판에서 유죄를 받은 수형인들이
직권재심을 받아 명예를 회복하고 있는데요.
이번에 60여 명이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희생자들은 모두 고인이 됐고,
유가족에게 남은 상처는
지워지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김하은 기자입니다.
◀ 리포트 ▶
1948년 서귀포의 서귀동에 살던
양청옥 씨.
여느 때처럼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마을은 이미 불바다가 됐고,
집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홀로 남겨진 양청옥 씨는
평생을 한 맺힌 삶을 살았습니다.
◀ INT ▶ 양청옥 / 고 양남학 씨 동생
"제일 한이 쌓인 건 배우지 못한 거. 초등학교 라도 나왔으면 이름자라도 알지만 그걸 모르거든. 8살 때 4·3 사건이 터지니까…"
오빠인 고 양남학 씨는
1949년 마을이 초토화됐다는 말을 듣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수를 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산에서 내려왔지만
그대로 군경에 끌려갔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군사재판을 받았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1956년 형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왔지만 '빨갱이'라는
낙인은 평생 그와 가족들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 INT ▶ 양남기 / 고 양남학 씨 아들
"(경찰서에서) 아버지가 어디 도망갔나 있나 없나 꼭 체크를 해요. 근데 그게 나중에 보니까 4·3 수형인에 빨갱이라고 그래서 그게 목록에 또 올라가 있는 거죠. 그걸 (보니까) 또 가슴이 너무 아픈 거라…"
70여 년이 지나서야
한은 풀렸습니다.
양남학 씨를 비롯해
군사재판 희생자 60명이
제대로된 재판을 받았고,
모두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 INT ▶ 방선옥 / 4·3사건 전담재판부 부장판사
"피고인들에 대한 각 공소사실은 각 범죄의 증명에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피고인들에게 각 무죄를 선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문. 피고인들은 각 무죄."
◀ INT ▶ 양남기 / 고 양남학 씨 아들
"참 4.3 이라는 상처가 이렇게 크구나. 완벽한 해결은 아직까지도 다 안 된 거 같아요. 후대까지도 이렇게 가슴 아픈 상흔이 남아있다는 게 아쉽기는 해요."
MBC뉴스 김하은입니다.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