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앵 커 ▶
제주 4·3사건은
국가가 국민을 표적으로 삼아
공권력으로 말살하려 했던
조직적인 국가폭력이었습니다.
4·3 78주년을 맞아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를 조명하는 순서,
국가폭력을 명령한 조병옥의 책임을
조인호 기자가 따져봤습니다.
◀ 리포트 ▶
4·3 당시 행방불명된
오빠의 이름이 새겨진 표석 앞에서
백발의 할머니가 통곡을 합니다.
◀ SYNC ▶ "오빠… 흑흑…"
열 여덟살,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오빠는 경찰에 잡혀갔고
78년이 지나도록 유해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 SYNC ▶
김연향 / 90세 (4·3 행방불명인의 여동생)
"(경찰이) 대문을 두드리니까 우리 큰 오빠가 확 나가버렸습니다. 맨발로 그게 끝이라. 그런데 그 순경들이 우리 큰 오빠를 잡으러 온거라. '큰 오빠 있냐?' 했습니다 제주 말로"
사건의 발단은
1947년 제주에서 열린 3.1절 기념집회.
경찰관이 탄 말에 아이가 채이자
항의하는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숨졌고 과잉진압에 반발하는
총파업으로 이어졌습니다.
미 군정 경찰의 최고책임자였던
조병옥 경무부장은
3.1절 집회가 북조선 세력과 통모했다며
대대적인 검거를 지시했습니다.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천500명이 체포됐습니다.
◀ INT ▶ 김호겸 / 당시 서귀포경찰서장(1999년)
"조병옥씨가 뭐라고 했냐면 허허 웃어요. 이 사람아 꿩 잡는 게 매라는 소리 못 들었어 그래. 왜정경찰이나 왜정경찰을 도운 사람들이라도
그 사람들 등용해서 공산당을 잡아야 돼"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가 경찰 지서를 습격하자
조병옥의 태도는 더 강경해졌습니다.
조병옥은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하던
김익렬 9연대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며
난투극까지 벌였습니다.
결국, 미 군정이
9연대장을 강경파인 박진경으로 교체하고
조병옥이 서북청년단을 투입하면서
무자비한 토벌작전이 시작됐습니다.
◀ INT ▶ 김기오 / 당시 제주신보 기자(1999년)
"제주 그때 전 인구가 20만 밖에 안 됐는데 20만명 다 죽여도 좋단 말이야. 소탕하란 말이야 무조건 빨갱이들. 제주도 놈들 다 죽여도 좋아(라고 조병옥이 말했다)"
◀ INT ▶
주진오 /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명예교수
"(4·3사건이) 자기 책임으로 돌아올까 봐 빨갱이로 몰고 이들을 오히려 더 강력하게 탄압함으로써 수없이 비참한 국가폭력이 일어나게 된 발단이 됐다고 얘기할 수 있겠죠."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반발한 조병옥은 1960년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지만
대선 직전 지병으로 사망했습니다.
◀ st-up ▶
"조병옥은 4.3 당시 중요한 고비마다
진압작전의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고 말했지만
독선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국가폭력에 의한 무고한 희생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희생자들에게 한번도 사과하거나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고
불가피한 희생이었다는 변명만 남겼습니다.
MBC뉴스 조인호입니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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