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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 05분

인터뷰 전문보기 (2019년3월28일~ 2023년7월10일)

6월 10일(수) [오늘의 시선] 한국전쟁과 연관된 제주의 기억 장소들(제주다크투어 백가윤 대표)

◇ 인터뷰 전문보기 자료에 대한 저작권은 제주MBC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할 경우, 채널명과 정확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이 프리뷰는 실제 방송 원고가 아닌 사전 원고로 작성된 것으로 실제 방송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윤 : 매주 수요일 이 시간에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눈으로 제주의 가치를 더하는 <오늘의 시선>으로 찾아옵니다. 오늘은 제주다크투어 백가윤 대표와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백 : 안녕하세요. 백가윤입니다.

윤 : 벌써 6월입니다. 코로라 19가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고 있는데요,
여전히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백 대표님 안녕하셨죠?
오늘은 어떤 주제를 갖고 오셨나요.

백 : 네. 6월엔 현충일도 있고, 6월 민주항쟁이 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국전쟁이 발발한 달이기도 한데요. 특히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는 해로 무엇보다 평화의 소중함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제주에서 격전이 일어나지는 않아 한국전쟁과 제주는 언뜻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제주에는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곳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한국전쟁과 연관된 제주 내 기억의 장소를 소개할까 합니다.

윤 :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군요. 한국전쟁과 제주, 우선 직접적으로 연관된 장소가 있을까요?

백: 아무래도 대정 지역이 일제강점기부터 군사유적이 많은 곳인데요. 대표적인 장소로는 강병대 교회가 있습니다. 강병대 교회는 지금도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잘 남아있는 곳입니다. 1952년 국군 공병대가 건설을 맡았다고 하는데요. 한국전쟁 당시 군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하게 병사를 길러낸다는 의미로 강병대 교회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하네요. 종교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야학을 운영하기도 했고요. 2002년 5월에 등록문화재 38호로 지정됐습니다.

윤: 역시 대정이 일제강점기부터, 4·3에 이어 한국전쟁까지 제주의 근현대 역사를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이군요. 대정에 또 한국전쟁과 관련한 곳이 있다면 어디가 있을까요?

백: 현재에도 군부대로 활용되고 있고, 최근에는 손흥민 선수가 훈련을 받았다고 하죠, 대정에는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신병을 양성할 목적으로 운영을 시작했는데요. 1956년 훈련소가 문을 닫을 때까지 50만 명의 신병을 길러낸 곳이라고도 합니다. 대정은 육군 제1훈련소 말고도 인근 학교 자리에 야전병원도 있었는데요. 지금의 대정여자고등학교 위치라고 합니다. 이곳은 1956년까지 운영되다가 군산으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당시 모습은 대부분 건물이 철거되면서 자취가 없는데요. 그 중 한 건물이 남아있어서 2017년 세계유산본부에서 문화재로 등록했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대정여고 실습실입니다. 4·3과도 연관이 있는 대정초등학교도 한국전쟁과 연관이 있는데요. 바로 이곳은 공군사관학교가 임시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1951년 2월부터 4월까지 80일 동안 짧게 있었지만 배출된 장교 후보생이 1,000명을 넘어섰다고 하네요.

윤: 대정 포로수용소 이야기도 있던데요.

백: 네 맞습니다. 대정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규모는 아니지만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가 위치했던 곳이 있습니다. 대정읍 하모리 76번지 인근에 당시 중국에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사람들을 위한 수용소 터가 일부 남아있는데요. 정식 명칭은 <제20수용소>였다고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전쟁에 참여한 당시 중국병사들을 수용했던 곳입니다. 실제로 작년에 저희 기행에 참가했던 중국인 참가자들이 이 수용소에 대해 문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1951년 2월 설치된 거제 포로수용소가 수용인원 한계에 다다르자 1951년 6월에 중국병사들 5,600여명을 모슬포 수용소로 이전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14,000명 정도가 수용됐었다고 하네요. 당시 모슬포성당 기초공사 일부도 여기에 수용됐던 포로들이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휴전협정 이후에 포로들은 포로교환 협정에 따라 처리가 됐는데요. 당시 모두 지금의 중국으로 간 것은 아니고요. 소위 반공포로들은 대만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윤: 한국전쟁 포로교환, 4·3과도 연관이 있는 인물이 있다면서요?

백: 한국전쟁 당시 포로교환하면 4·3과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딘 소장입니다. 4·3 당시 미군정 최고 책임자이고 했고, 1948년 5월 조병옥 경무부장과 함께 제주를 극비 방문하면서 강경 정책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딘 소장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에 당시 미 육군 24단장으로 참전했는데요. 대전지구에서 전투를 벌이다 길을 잃고 산속에서 헤매던 도중 1950년 8월 25일 인민군에 잡혀 포로가 됩니다. 이후 1953년 포로송환 협정이 이뤄지고 나서야 그해 9월에 석방됩니다.

윤: 딘 소장의 4·3 과정에서 역할은 오늘 크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기 한데요. 추가적으로 소개해 주실 내용이 있을까요?

백: 영문 자료로 이미 나와 있기는 한데요. 4·3 당시 제주에는 미군 59군정중대가 주둔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딘 소장이 59군정중대에게 보내는 사실상의 작전 명령 내용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궁금해서 추가로 미국에서 출판된 딘 소장의 자서전을 구입해서 일부 읽어 봤는데요. 4·3 관련된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지만 북한에 잡혀갔을 때 조사 과정에서 당시 자신이 군정장관으로 제주에 왜 군대와 경찰을 보냈는지, 왜 철도와 전차 파업에 가담한 사람들을 구속했는지, 왜 1948년 5월 선거를 그러한 방식으로 진행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딘 소장이 제주에 군대와 경찰을 보냈다는 것이 자서전에도 나와 있는 것이지요.

윤: 그러면 한국전쟁 70주년, 대정을 가면 당시 자취를 일부 확인해 볼 수 있는 기억의 장소가 있다는 말씀인데요. 그렇다면 현재 체계적으로 관리는 어떻습니까? 잘 되고 있을까요?

백: 등록문화재 등으로 지정된 이후에는 관련한 내용에 대해서 이정표 등이 세워져 있긴 합니다. 또 현재 대정초등학교 옆, 4·3과도 연관이 있던 대정면사무소 자리에 민간차원에서 대정현역사박물관이라는 소중한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이곳에 가시면 대정의 근현대 모습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대정의 일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또한 해방 이후 미군이 직접 제주에도 와서 일본군 항복 문서 조인식을 진행할 정도로 일본군 군대가 제주도에는 대규모로 주둔했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대정지역에 있던 각종 무기들이 철거되는 모습을 담은 영상도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윤: 이런 기억의 장소 말고도 한국전쟁 당시에도 제주도민들이 전쟁에 참여한 숫자도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백: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 청년 3,000여명이 해병대 3기, 4기로 참여했습니다. 해병대 첫 모집병은 제주출신이 100%였다고 합니다. 1950년 8월 5일 입대한 해병 3기는 교사와 청년이 주축이었고 8월 30일 입영한 4기는 대다수가 학생이었다고 하는데요. 약 3,000여 명의 해병대 3, 4기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1948년 12월 28일부터 1950년 9월까지 해병대 사령부가 제주도에 있었는데 이 터가 중앙로 인근에 남아있기도 합니다.

윤: 이렇게 대규모로 참전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백: 물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점도 있기는 한데요. 4·3의 끝자락이던 한국전쟁 당시 빨갱이라는 누명을 벗고자 참전을 하게 됐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습니다. 4.3 때 군경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레드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혈서까지 쓰며 입대했다고 합니다. “조국을 지키려 참전한 사람이 어떻게 빨갱이일 수가 있느냐”고 항변하면서 말입니다.

윤: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대정지역에 남아있는 기억의 장소와 해병대 이야기를 들어 봤습니다. 4·3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야기도 있을 수밖에 없는데요. 소위 다른 지역에서는 보도연맹, 제주에서는 예비검속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 자세히 알려주시죠?

백: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4.3은 무려 7년 7개월에 걸쳐 일어나게 됩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소위 초토화 작전 시기인 1948년 말, 1949년 초 사이에 돌아가시죠. 그리고 좀 잠잠한가 했더니 다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4·3은 <예비검속>이라는 광풍과 마주하게 됩니다. 예비검속이란 말 그대로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예비로 검속한다”라고 볼 수 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섯알오름, 백조일손지묘, 만벵듸 등이 다 예비검속과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주에서의 한국전쟁은 제주 4.3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공식적인 제주 4.3 기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도 했고요, 제주에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요.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바탕으로 4.3 때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또 이 명단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때 예비검속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을 잡아들입니다. 여기서 끝나는 줄 알았더니만 이 명단은 70~80년대 군부독재 시기에 조작간첩 사건으로도 이어지게 되지요.

윤: 마지막으로 대정의 근현대사 역사와 연관해서 평화대공원 건설 계획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백: 주요 선거 때마다 단골메뉴처럼 평화대공원 계획이 공약으로 발표됐습니다. 일제강점기 유적인 알뜨르 비행장을 평화대공원 부지로 활용하려는 것인데요. 원희룡 도지사도 2017년 10월에 평화대공원 조성사업 재추진을 공언하기도 했고 2019년에도 평화대공원 사업 실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평화대공원 조성 계획을 공약했지요. 그러나 아직까지 정치인들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나 알뜨르 비행장은 난징을 폭격하기 위한 일본의 전투기들이 연료를 채우고 떠났던 곳이기도 해 그 끔찍한 역사를 기억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되새길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 장소를 평화와 인권의 장소로 만들어 나가는 일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윤 : 오늘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