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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 05분

인터뷰 전문보기 (2019년3월28일~ 2023년7월10일)

2022년12월19일(월) 을묘왜변과 제주대첩 승리의 역사미디어제주(김형훈 미디어제주 편집국장)

◇ 인터뷰 전문보기 자료에 대한 저작권은 제주MBC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할 경우, 채널명과 정확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지건보> 오늘은 앞서 예고해 드린 대로 제주대첩 을묘왜변 이야기를 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미디어제주 편집국장이신 김형훈 기자와 함께 제주 역사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죠 스튜디오에 나와 주셨는데요 안녕하십니까?

김형훈> 네 안녕하십니까 김영훈입니다

지> 네 한동안 건축 분야에 몰두하셔서 집중 취재도 하시고 관련 책도 내시면서 바쁘게 보내셨는데 이번에는 또 제주의 역사에 대한 책을 내셨더라고요

김> 본의 아니게 불러주는 분들이 계셔서 제가 학부는 역사 전공입니다 사학인데

지> 대학에서 전공하셨다고

김> 대학에서 역사 전공을 했고 또 미디어제주뿐만 아니고 그전에 직장에 있을 때도 역사 관련을 계속 연재를 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불렀는지 왜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지> 제가 보기엔 나중에는 제주사나 아니면 제주학 이쪽으로 학위를 받으셔도 될 법 할 정도로 굉장히 좀 두루두루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데 이번 책의 핵심은 을묘왜변 제주대첩 이야기입니다

김> 책은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이라는 제목이고요

지> 이게 방송을 통해서 보신 분들 계실지 모르겠는데 얼마 전 제주MBC에서도 이게 TV다큐멘터리로 저희가 제작을 해서 방송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유튜브에 스튜디오 제주MBC에 들어오셔서 을묘왜변 제주대첩 이렇게 검색을 하시면 다시보기로 보실 수가 있는데 최근 들어서 역사 속에 가려진 을묘왜변을 좀 재조명하자 이런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을묘왜변이 어떤 역사인지 그 내용부터 좀 알고 얘기를 나눠봐야 될 것 같아요

김> 을묘왜변은 이름에서 보듯이 왜변 그러니까 왜구가 이렇게 변을 일으킨 사건이 됩니다 이게 1555년 명종 10년 때 발생을 했고요

지> 그럼 지금으로부터 한 470여 년 전이라고 봐야겠네요

김> 네 70년 가까이 되죠 그때 왜구가 쳐들어오면서 전남 지금 해남 달량포구인데 거기로부터 이제 먼저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북쪽으로 계속 오다가 그 다음에 전라도를 그냥 휩쓸었어요 가는 곳마다 승리를 하고

지> 왜구가?

김> 그렇죠 계속 올라오면서 자신들의 목표는 이제 한양까지 가는 게 목표였고 그 중간에 영암성이라고 영암성 전투에서 패배를 하게 됩니다 1차 패배를 하고 그러다 다시 내려오는데 이 영암이라는 지역이 좀 특별한데 월출산은 여러분들 잘 아실 겁니다 내륙으로 우리가 보는데 그 당시는 내륙이 아니었어요 그 당시에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또 영암성은 바다로 잡혔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 왜구가 북쪽으로 육상으로 가면서도 또 해상으로도 이제 영암성으로 들어가는데 거기서 이제 일대 전투가 벌어지고 영암성 전투에서 그래도 마침 이렇게 의병도 있었고 양달사라는 의병 또 관군 협력으로 물리치죠 이제 거기서 패퇴한 또 왜구들이 또 내려오면서 이제 노략질을 하기 시작해요 전남 일대 그 왜구들이 다시 나중에 한 달 후쯤에 제주도도 이제 공격을 하게 됐는데 그때 제주도 사람들이 이기게 됩니다

지> 그러면 지금 시기적으로 보면은 이게 아까 1555년 조선 명종 10년이라고 하셨는데 한 5월쯤에 전라도를 이제 침탈을 하고 6월쯤에 이제 제주도를 침공을 한거잖아요?

김> 6월 말에 이제 제주에 들어오고

지> 시기적으로 보면 임진왜란보다 좀 더 빠르네요 임진왜란이 1592년이잖아요 임진왜란은 선조 때고요 선조 25년 때인데 그러면 왜 우리가 이런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좀 들긴 하거든요 이게 우리가 지금 교과서 제가 좀 기억을 못하는 건가요? 교과서에서 배운 적이 있던가요?

김> 아마 우리 때는 배웠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있는 역사 교과서는 아예 없어요 왜냐하면 요즘은 근현대 부분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러니까 예전에 그러니까 임진왜란 부분도 몇줄이 안 됩니다 (교과서를 보시면) 여기 역사 교과서에 임진왜란 부분도 몇 줄이 안 돼요 몇 줄이 안 되는데 을묘왜변이 들어갈 자리는 더 없습니다 교사 지도용 교과서에는 4글자는 있어요 그거는 이렇게 그 본문에는 있는 게 아니고 참고하라면서 작은 글씨로 을묘왜변 이라고 되어 있는데 학생들이 보는 교과서에는 을묘왜변이라는 네글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요즘 학생들은 배울 수 있는 길 자체가 없는 거죠

지> 그러니까 지금 현재로서는 한국사 교과서에서 언급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라는 말씀이시네요

김> 네 그리고 제주도 상황은 더 심각한데 이게 제주에서 이제 큰 전투를 벌이면서 이겼거든요 영암보다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암 전투하고 제주 전투를 차별을 둡니다

지> 지금 영암에서 있다가 거기서 쫓겨서 제주도로 온 거잖아요

김> 어쨌든 내려오면서도 노략질을 하다가 다시 제주를 이제 탐한 건데 그들이 보기에는 실록 그러니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암 전투하고 제주 전투를 비교하기를 영암은 소첩 그러니까 작은 승리 제주는 대첩 큰 승리

지> 조선왕조 실록이요? 그 자료를 가져오셨네요

김> 보여드리면 여기 대첩 크게 돼 있죠

지> 네 크게 보이네요 대첩이 그만큼 영암은 왜구를 어떤 수성하는 측면에서의 전투 소첩이었고 제주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대첩으로 표현을 하면서 또 파적 이런 표현도 썼다고 하더라고요 그 의미는 이제 그 승리의 어떤 의미가 다르다라고 보여주는 거죠

김> 또 제주 역사 같은 경우에는 이 승리가 어느 정도 준비된 승리였다고 볼 수가 있거든요 영암성 전투는 그나마 이렇게 좀 며칠이 지나면서 관군하고 의병이 모여서 승리를 할 수 있었는데 패퇴한 왜구들이 나중에 제주도로 이제 들어오면서 그 당시에는 보니까 김수문 제주 목사가 을묘왜변 터지기 3개월 전에 제주 목사로 들어옵니다 무관인데

지> 무관 출신이세요

김> 네 그러면서 제주에서는 어느 정도 준비가 이제 돼 있었다고 볼 수도 있고 또 왜냐하면은 제주도 같은 경우는 그 해 3년 전에 1552년에 이제 왜구 침입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지> 그래서 제주는 왜 환해장성이라고 이렇게 바닷가 쪽에 그런 흔적들이 많이 있잖아요

김> 그것도 있고 천미포에서 이렇게 외국 수백 명이 들어와서 크게 이렇게 다친 기억이 있거든요 아마 이제 그런 것도 있고 왜구 침입이 좀 잦았습니다

지> 저도 그 말씀을 좀 드리고 싶었던 게 사실 환해장성이라는 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만드는 것인데 그만큼 어떻게 보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제주는 이렇게 침입을 받고 수탈을 당하는 그런 섬으로만 생각을 했는데 우리가 왜구를 크게 이긴 이런 대첩의 역사가 있다는 게 굉장히 좀 신기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거든요

김> 그렇죠 왜냐하면 제주 역사를 흔히 얘기할 때 좀 안타까운 게 뭐냐 하면 늘 이렇게 핍박받는 역사만 보여주고 있거든요 우리 몽골도 그렇고 또 고려말에 이제 묵호의 난도 부끄럽고 그다음에 현대에서는 4.3도 그렇고 늘 제주도민들은 피해만 받는 그런 도민으로 인식돼 왔는데 제주대첩은 그게 아니거든요 아까 김수문 제주목사도 있었지만 그 목사가 역할을 100%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밑에 있었던 제주도민들의 역할이 더 컸습니다

지> 그러면 왜구가 어느 정도 규모로 내려왔던 거예요?

김> 처음에 그러니까 전남으로 처음에 갔을 때는 규모가 70척에 6천 명 그러다가 제주로 왔을 때는 그것도 한 수십 척이 되죠 한 1천 명 정도로 이제 알려져 있고. 들어온 거는 화북 포구 화북으로 해서 들어왔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제주성 인근 제주 동문 인근부터 해서 남수각까지 왜냐하면 그 일대가 좀 높거든요 높으니까 제주성을 이렇게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지> 오히려 안으로 들어와서 읍내를 이렇게 쳐다보면서 침입을 했다는

김> 네 그러면서 3일간 이렇게 동태를 살피다가 우리가 치마돌격대라고 있고 효용군이라고 있습니다 효용군이라는 거는 날랜 병사를 얘기하거든요 효용군 70명을 투입시켰고 그리고 이제 치마돌격대라는 건 뭐냐

지> 치마 돌격대요?

김> 치마

지> 짧은 치마를 얘기하는 건 아닐거교

김> 아닙니다 치가 한 자로 달릴 치 말 마, 말을 타는 데 굉장히 말을 잘 다루는 병사를 투입한 거죠

지> 제주는 조선시대부터 그게 몰테우리라고 해서 말을 다루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또 그런 것들이 연관이 있네요

김> 어쨌든 말 위에서 이렇게 활도 쏘고 군사적인 능력이 굉장히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고 그러니까 준비됐던 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영암성 전투는 효용군이 몇 명 되질 않아요 효용군을 보냈다고 하는데 제주도는 70명을 보내서 박살 내기도 하고 그 다음에 치마돌격대로 이제 들어갔다고 기록이 나와 있거든요

지> 그러면 지금 말씀하신 70명의 효용군과 이분들은 군인이신 거고 치마돌격대는 그럼 민군으로 봐야 되나요

김> 다 군인인데 계급들이 다 다릅니다

지> 그래요 그럼 이분들이 결국에는 제주대첩의 어떤 영웅이신 분들이네요

김> 영웅이라 그러니까 수십 명의 영웅은 있죠 그리고 이제 그 분만 그 사람들만 아니고 그 나머지 병력을 또 퇴치하기 위해서 주변 인력들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지> 우리는 이렇게 인력이 병사가 별로 많지 않은 상태에서 대첩을 했다는 얘기인가요?

김> 아마 더 있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그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걸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 일이지만 그 시대상 계절 그런 걸 한번 따져보고 그 당시 이 군사 인력이 어느 정도 됐는지 그걸 좀 더 체계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마 대략 그 당시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 상상은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 네 저희가 방송 이 짧은 시간에서 많은 내용들을 전달해 드리긴 좀 어렵고 지금 미디어제주의 김영훈 기자께서 쓰신 시리즈 기사가 있습니다 그 기사를 검색해서 보시거나 제주MBC 유튜브 스튜디오 제주MBC에 올라와 있는 을묘왜변 제주대첩 이야기를 찾아서 좀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동안 이제 역사 책에서도 다루지 못했던 을묘왜변이 최근에 학술 세미나도 열리고 관련 책도 나오고 이제 관심이 커지고 있단 말이에요 이렇게 부상하게 된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김> 앞서 얘기 말씀드렸듯이 제주도민들이 계속 핍박만 받아왔는데 크게 이겼다는 그런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사건이 없었거든요 충분히 우리가 이거를 가지고 제주도민들한테 우리 이렇게 대단한 승리의 전쟁사가 굉장히 재밌거든요

지> 이게 또 하나의 전쟁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김> 저뿐만 아니고 같이 연구했던 사람들은 이거는 대단한 건데 우리가 놓치고 있다 그리고 아까 470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2025년이 되면 을묘왜변이 일어난 그러니까 제주대첩이 일어난 지 470주년이 됩니다

지> 그러네요

김> 그러면은 470주년에 뭔가 큰 우리가 행사도 할 수 있거든요 그걸 기점으로 뭐 뮤지컬도 만들 수 있고 새로운 재미있는 책자도 만들 수 있고 전쟁 콘텐츠도 만들 수도 있고 그 당시에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 무기도, 그러면 이제 왜구가 싸웠던 무기와 우리가 싸웠던 무기, 무기도 이제 비교도 할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치마돌격대가 말을 타고 싸웠는데 대체 어떻게 달렸는지 어떻게 싸웠는지 그런 걸 또 보여주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는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 그렇군요 그러니까 을묘왜변이 이게 어떻게 보면 제주의 역사 문화자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고 그만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콘텐츠가 있다는 말씀을 해주시는 건데 지금 아까부터 이제 을묘왜변이라는 말과 제주대첩이라는 표현을 지금 섞어 쓰고 있는데 이게 지금 같은 거 아닌가요

김> 같은 거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임진왜란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근데 그중에 3대 대첩이 있습니다 한산도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 그런 식으로 을묘왜변 중에 제주에서 큰 승리를 한 제주대첩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겁니다

지> 예 그렇군요 제주에서 승리한 그것을 이제 제주대첩이라고 부르자라는 의미로 얘기를 하신거군요

김> 그렇죠 지금까지는 이렇게 제대로 안 불렸는데 또 제가 이 실록을 이렇게 가져온 이유는 뭐냐 하면 이제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할 때 조선왕조실록은 검색만 하면 다 보이거든요 우리가 대첩만 하게 되면 대첩, 한글로 치게 되면 큰 승리를 로밖에 안 나와요 대첩으로 안 나옵니다 원문을 봐야 되는데 원문을 보지 않고 평가하다 보면은 우리가 사료를 제대로 해석을 하지 못합니다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원문을 찾아보는 습관을 해줘야 돼요 원문엔 분명히 대책으로 돼 있거든요

지> 네 그만큼 이제 의미가 크다는 말씀을 이제 강조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우리가 이 콘텐츠를 역사 문화자원으로서 또 이렇게 잡기 위해서는 제주 차원에서도 어떤 노력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떤 노력들이 좀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김> 가장 중요한 건 뭐냐 하면 홍보를 해야 되는데 학생들 대상으로 하는 홍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금 제주 역사 이해 교육을 하는데 교육청 차원에서는 제가 한번 쫙 보니까 을묘왜변 부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학생들은 을묘왜변이 뭔지도 모르고 뭐 제주대첩은 더더욱 모르는 거죠 이런 이해 교육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게 초등학교 4학년에 그런 수업 과정이 있거든요 2024년도에 이렇게 바뀐다고 하는데 내년도부터 작업을 해서 2024년도 4학년 교과서의 사회 교과에 을묘왜변이 제대로 들어갈 수 있게끔 이렇게 해주면 굉장히 좋을 것 같습니다

지> 그러려면은 또 민간 차원에서도 어떤 기념사업회나 이런 학술적인 연구들 특히 이 연구는 제주뿐만 아니라 전남 지역하고 영암 알려주셨지만 이게 지역적인 이렇게 협업을 통해서도 연구가 가능한 부분이 될 것 같은데요

김> 가능합니다 가능하고 이거는 또 이 당시 왜구는 후기 왜구라고 불리는데 아주 순수한 의미에서 왜구가 아니거든요

지> 아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 후기 왜구를 얘기하시는거죠

김> 그렇죠 대마도 위주의 왜구를 전기왜구, 흔히 그렇게 부르는데 그건 진짜 순수 우리가 알고 있는 왜구고 후기 왜구는 다국적입니다 중국 상인들도 끼어 들어가 있고 을묘왜변에 이제 주인공 일으킨 주인공도 중국인이거든요 중국인이 포함이 돼 있기 때문에 다국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지> 그렇군요 최근에 제주언론 학술상도 수상을 하시고 기자로서 건축 역사 그때 마을 미디어도 같이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김> 이것저것 다 하고 있습니다

지> 다양한 분야의 관심과 작업들을 해오고 계시는데 앞으로 이런 역사들에 대한 우리 제주의 역사들에 대한 재조명들 이런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질 것들이 좀 많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김> 너무 많습니다 왜냐하면 특히 제주는 사료가 좀 빈약하거든요 빈약한 사료를 어디서 찾느냐 주변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거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주도 같은 경우에는 제주 단독으로 있지 않고 해외와의 교류가 분명히 있었으니까 주변 나라의 사료를 좀 더 찾아보면 제주의 궁금한 점들이 많이 밝혀질 겁니다

지> 네 알겠습니다 오늘 얘기 나누다 보니까 정말 풀 스토리를 제대로 이렇게 막 듣다 보면은 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처럼 굉장히 재밌게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앞으로 좀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우리 역사 을묘왜변 중에 이 제주에서 유일한 승전사 제주대첩에 대한 관심도 많이 가져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오늘 미디어 제주 편집국장이신 김형훈 기자와 함께했습니다 도움 말씀 감사합니다

김>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