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문보기 (2019년3월28일~ 2023년7월10일)
2022년12월21일(수) 경계인이 아닌 세계인, 바람의 건축가 이타미 준에서 유동룡으로 만나는 미술관(유동룡 미술관 유이화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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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건보 > 다들 들어보셨을 텐데 제주 방주교회, 포도호텔, 수풍석 뮤지엄 등 이런 건축물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죠 고 유동룡 선생을 기리는 유동룡 미술관이 제주 한경면 저지리 예술인 마을에 개관을 했습니다 이 미술관의 관장을 맡고 있는 고인의 따님이자 건축가인 유이화 대표를 연결해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전화 연결돼 있는데요 안녕하십니까
유이화> 네 안녕하세요
지> 네 개관이 얼마 되지 않았죠
유> 네 12월 6일 날 개관했습니다
지> 네 유동룡 미술관이라고 하면 잘 모르시는 분도 계실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동룡이라는 이름보다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지신 분인데 일단 이름을 유동룡 미술관으로 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유> 아무래도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이 어쩔 수 없이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한 작가명이기도 했었는데요 또 평생을 귀화하지 않으시고 또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던 분인 만큼 한국 이름을 되찾아드리고 싶었습니다
지> 네 그래서 유동룡 미술관이라고 이제 하신 것 같은데 이 미술관은 이제 구상하신 게 꽤 오래전부터라고 들었거든요 언제부터 준비를 하셨는지 또 개관한 지 얼마되지 않은 이제 12월 6일이었기 때문에 소감도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유> 사실 2011년도에 소천하시면서 유언을 남기셨어요 그래서 이타미 준 기념관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라는 유언이 있으셨어서 그때부터 구상은 사실 시작을 했고요 저희가 실행에 옮긴 것은 2019년도에 저지예술인마을에 그 문화 도유지로 묶여져 있던 땅이 이제 공고가 나왔어요 그래서 미술 사업 미술 쪽에 어떤 그런 예술 쪽에 사업을 하려는 회사들 상대로 공고가 나왔었기 때문에 저희가 저지 예술인 마을이 너무 좋아서 이 도유지를 저희가 매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계획이 2018년도에 도유지를 매입하면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지> 네 그러면 이게 어찌 됐든 사비로 구입을 하신 거잖아요
유> 네 그렇습니다 사립입니다
지> 건립 비용 마련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유> 너무 쉽지 않았고요 사실 저희가 큰 대기업도 아닌 상황에서 또 이렇게 개인이 한다라는 게 물리적으로 많이 어려운 부분도 많았었는데 그래도 또 많은 후원자분들이 응원도 해주시고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 예 대단하십니다 사실 이게 이 땅을 토지를 구매하는 단계부터도 아마 많은 고민들이 있으셨을 텐데 건립까지 건축까지 이어진다는 것도 쉽지 않았고 짧은 시간 안에 이제 그런 것들을 많은 도움을 받으시면서 하셨다는 얘기를 해 주셨는데 사실 이제 건축가 이타미 준으로 많이 더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그리고 평생 앞서 얘기하신 것처럼 이제 귀화를 거부하고 살아오신 걸로도 알려져 있고 근데 이제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는 게 왜 평생 귀화를 거부하셨나라는 질문들을 하시는 분도 계시거든요 왜 거부를 하셨다고 보시나요
유> 사실 그건 저희 조부모님들의 교육 때문인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일제시대 때 사실 1910년대에 일본을 넘어가셨는데요 그때도 물론 이제 재일교포로서 일본에서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는 정말 밑바닥 일부터 안 해보신 일이 없을 만큼 정말 험한 일들을 많이 하셨는데 그렇지만 한국인으로서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을 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늘 저희 아버지한테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심지어 내 눈에 들어가기 전에는 귀화는 절대 안 된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실 만큼 그리고 또 저희가 무송 유자를 쓰는데요 사실 일본에 이 무송 유자가 없어서 이타미 준이라는 팬네임을 만들 수밖에는 없기도 했었는데 이 무송 유자가 저희 후보님들이 그러셨다 그래요 우리 유금필 장군님의 후손인 만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인으로서 항상 자부심을 가져야 된다고 심지어는 불이 나더라도 집에 불이 나더라도 족보만큼은 가슴에 지니고 도망가가라고 하셨을 만큼 한국인으로서의 그런 자긍심을 저희 아버지의 가슴에 이렇게 심어주셨습니다
지> 네 그러니까 재일교포시지만 사실 일본에서도 일본 국적으로 이렇게 좀 귀화를 하기 원하시는 분들도 아마 계셨을 거예요 그렇죠
유> 그렇죠
지> 왜냐하면 또 2010년인가요 일본 최고의 건축상 또 무라노 도고상도 받으시면서 아마 또 그런 얘기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런 이제 귀화 거부하고 한국인으로 이제 사셨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가 듣기로는 이타미 준이라는 아까 예명의 어떤 에피소드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유> 그렇죠 아까 잠깐 말씀드렸지만 저희 무송 유자가 일본에 활자가 없다 보니까 저희 아버지는 본명으로 초중고 대학교까지 다 다니셨거든요 했는데 이제 작품을 발표하려고 그때 당시는 잡지 밖에는 작품 발표를 못 하니까 비유를 하셔야 되는데 무송 유자가 활자가 없다 보니까 그래서 굉장히 고민 끝에 저희 그때 당시에 정말 가깝게 지내던 작곡가 길옥윤 선생님이 작고 하셨지만 그래서 길옥윤 선생님께서 작가명을 요시아 준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하고 계셨을 당시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길옥윤 선생님하고 상의를 했었죠 그래서 이게 팬네임을 만들어야 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하시던 중에 길옥윤 선생님이 형제고 나도 준이니 너도 준해라 해서 준이 되셨고요 이타미는 그때 당시 이타미 공항을 통해서
지> 오카사 공항 얘기 하시는 겁니까
유> 네 맞습니다 오사카에 있는 이타미 공항을 통해서 처음으로 한국 고국을 방문을 하셨거든요 저희 아버지께서 그래서 본인은 국제인으로 앞으로 살겠다라는 뜻으로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지> 네 어떻게 보면 재일교포라는 위치가 경계인의 삶인데 그 경계인을 뛰어넘어서 이제 세계인으로 국제인으로 사시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이제 제가 듣기로는 뭐 그 아버님하고 이게 뭐 건축가이기 전에 술 친구이자 동지다 뭐 이런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로서 이 유동룡 선생은 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유> 굉장히 따뜻한 분이시기도 하셨는데 엄청 엄하신 분이기도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불만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게 본인 스스로한테 가장 엄격한 잣대로 가장 엄격한 기준으로 사셨던 분이기 때문에 제가 뭐라고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죠 그렇지만 한없이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지> 워낙 타협하지 않는 분이셨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특히 이제 건축과 관련된 분야에 있어서는 타협을 하지 않으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유대표님도 그러신가요
유> 저는 아버지보다는 조금 타협하는 편인 것 같아요 아직은
지> 네 이제 부드럽게 부드럽게 이제 사시는 것 같은데 혹시 아버님에게 좀 칭찬을 많이 받으셨습니까 아니면 따끔한 지적을 많이 받으셨습니까
유> 저희 아버지는 항상 칭찬을 하시는 편이셨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도 민망할 정도로 칭찬을 항상 하셨으니까 저는 혼난 기억보다는 칭찬받은 기억이 더 많기는 합니다
지> 그러면 아버지에게 받은 최고의 칭찬의 말은 어떤 얘기였나요
유> 아 많은 부분이 있는데 역시 역시 이런 말이 굉장히 함축적으로 역시 내 딸이다 이런 말들로 들렸어서 저는 그 칭찬이 가장 기분 좋았습니다
지> 그렇군요 역시 내 딸 맞다 이런 표현들로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사실 따님이신 유이화 대표께서도 건축하시잖아요
유> 예 그렇습니다
지> 근데 처음에는 인테리어를 먼저 전공하시고 나중에 건축을 또 전공하셨더라고요
유> 네
지> 물론 아버님의 영향을 받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근데 건축가가 되겠다고 하셨을 때 아버님께서 반대하셨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유> 너무 반대 하셨죠 사실
지> 왜 반대를 하셨던 거죠
유> 저희 때는 고1때 이과, 문과를 나눴어야 했는데 제가 고1 가을방학 때 이과 지원을 하면서 아버지 저는 건축과를 가고 싶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너무 반대를 하시더라고요 사실 너무 리액션에 깜짝 놀랐었는데 무슨 여자가 건축을 하려고 하느냐 그게 여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얘기를 하시다가 제가 너무 가고 싶어 하니까 이화여대의 건축과가 있냐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생겼는데 그때는 이화여대 건축과가 없었어요
지> 그럼 혹시 지금 유이화 대표님의 이름도 학교 이름하고 연관이 있는 건가요
유> 네 맞습니다 한자까지 배나무 이자에 꽃 화자예요 이화여대 가서 좋은 신랑 만나서 잘 살라고 아주 보수적인 그런 사고를 가진 분이셨어요.
지> 이화여대에도 건축과가 있었나요
유> 지금은 있는데 제가 어플라이(지원)할 당시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가장 유사한 과를 찾은 게 인테리어디자인학과 실내환경디자인 전공이면 어떻습니까 말씀드렸더니 그거라면 괜찮다 이화여대라면 괜찮다 했는데 그래서 학교와 과를 고1 10월달에 정해놓고 그 학교 그 과를 들어갔죠 그런데 공부를 해도 아무래도 건축에 대한 갈증이 계속 있어서 반대를 무릅쓰고 졸업한 후에 다시 건축과로 들어갔습니다
지> 그래서 또 뉴욕에 또 이렇게 유학도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생전에 아버님하고 이렇게 파트너로 같이 작업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그러면 혹시 제주에도 두 분이 같이 작업하신 게 있나요
유> 제가 2001년도에 돌아와서 포도호텔 거의 마무리쯤이기는 했지만 현장 감리부터 일을 시작을 했구요 그리고 2002년도에 제가 처음에는 이타미 준 건축연구소 서울지사 개소를 했습니다
지> 서울 지사가 있었군요
유> 그렇습니다 네 그래서 그때 2002년도 이후에 많이 아시는 수풍석 미술관이라든지 방주교회라든지 더 클래식 골프장, 폴로 클럽 등등 2002년도 이후에 모든 이타미 준의 건축 프로젝트들은 제가 같이 했습니다
지> 굉장히 작업을 많이 하셨네요 잘 맞으신 건가요
유> 제가 잘 맞았다기보다는 제가 잘 알아듣기는 하더라고요
지> 아버님한테 많이 맞춰드렸나요
유> 물론 당연히 저는 아버지 이전에 굉장히 좋아하는 그리고 존경하는 건축가셨기 때문에 어떻게든 아버지의 작품을 최대한 아버지의 의도를 결과로 이어질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지> 네 지금 말씀하신 포도호텔, 방주교회, 수풍석 박물관, 두손 미술관, 핑크스 골프 클럽하우스 이런 것들 사실 제주에서 대표적인 건축물이거든요 그래서 높은 평가를 또 받고 많은 분들이 찾는 명소이기도 한데 대표님 보시기에 아버님이 남긴 제주 건축물 중에 다 좋아하시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애정을 가지고 좀 좋아하시는 곳이 있다면 어디를 꼽으실까요
유> 저는 개인적으로 수풍석 미술관도 좋지만 방주교회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래도 콜라보 많이 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아버지도 애착이 굉장히 많으셨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가 사실 방주교회지만 많은 분들이 지금도 방주교회라고 불리지만 저희 프로젝트 이름은 하늘의 교회였거든요 그래서 어떤 하늘의 형상을 구름이 흘러가는 어떤 그런 모습이 됐던 빛의 흐름이 됐던 그런 부분들을 건축에 최대한 반영을 해보자라는 어떤 실험적인 작품이기도 그래서 그 과정도 고통스러웠지만 굉장히 즐거웠고요 그리고 결과도 굉장히 만족스럽게 나와서 그리고 사실 그런 하늘의 현상을 건축에 반영해 보자라는 작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저는 좋아하는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지> 그렇군요 하늘이라는 표현을 강조하셨지만 사실 이타미 준은 바람의 건축가로 유명하시죠
유> 네
지> 그만큼 이제 이 하늘과 바람에 굉장히 애착을 많이 하셨는데 어떻습니까 건축가 유이화로서 이타미 준의 유동룡 선생의 건축은 이런 것이다 라고 표현한다면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유> 저는 이타미준의 건축은 따뜻함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늘 말씀하셨던 게 지금 현대 건축이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결핍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거는 인간의 체온과 야성이다 이런 이야기를 항상 하셨거든요 그래서 어떤 본인의 성품하고 닮은 작품들이겠지만 당연히 그런 따뜻함이 묻어져 있는 게 이타미 준 건축의 특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 그러면 하나 좀 더 여쭤볼게요 사실 마지막으로 남은 손의 건축가라고 스스로를 얘기하실 정도로 컴퓨터 설계 이런 거 배제하시고 아날로그 드로잉의 가치를 굉장히 많이 부여를 하시더라고요 손의 건축이 갖는 힘 어떻게 보시나요
유> 컴퓨터에서 나오는 건축은 온기 자체가 없다고 믿으셨어요 그리고 사실 저도 실제로 일을 해봐도 컴퓨터 안에서 화면 안에서 작품을 만든다는 건 사실 왜곡도 많이 있고 그리고 또 조형성을 끌어내기가 사실은 많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손에서부터 저희 아버지는 항상 드로잉을 해서 형태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부터 에너지가 들어가고(...) 그 결과로 이어진다고 믿으셨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지> 지금 말씀하신 동안 좀 방송 오디오가 고르지 못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좀 아쉬워하실 것 같은데 전화 연결이다 보니까 또 이런 점들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이타미 준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올해로 11년이 되는 거죠
유> 예
지> 그래서 사실 많은 것들을 생각하시면서 미술관이 이제 개관을 했는데 이 건축가가 남긴 것이 미술관으로 개관한다는 것도 굉장히 좀 재미있는 표현인데 사실 생전에 그림도 직접 많이 그리셨더라고요 회화 작가로서도 많은 것들을 남기셨죠
유> 건축가로서의 인생도 있으셨지만 화가로서의 인생도 있으셨어요 그래서 어떤 그런 예술의 영역을 넘나드는 그런 경계가 없는 예술가셨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미술관 자체도 어떤 건축만 보여주는 예술관이기 보다는 좀 그런 경계를 넘어서 미술이라든지 음악이라든지 심지어 무용까지도 같이 공존할 수 있는 그런 미술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 네 할 얘기가 참 많은데 저도 여쭤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한데 사실 이제 시간이 좀 제한이 돼서 미술관 얘기도 좀 들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이제 개관을 했기 때문에 이미 찾아가 보신 분도 계시고 또 관심을 가지고 가봐야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 지금 미술관 가면 어떤 작품들을 좀 만나볼 수 있을까요
유> 많은 분들이 이타미 준의 건축하면 제주의 포도호텔이라든지 방주교회, 수풍석 미술관을 대부분 떠올리시는데요 지금 전시장에 오시면 이타미 준의 초기 작품 70년대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마지막 또 제주가 아닌 일본이라든지 또 다른 지역에 있는 작품들까지도 40여 년간의 이타미 준의 대표 작품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 그렇군요 그러면 이제 보통 이제 건축하실 때 어떤 드로잉 작품들이 좀 꽤 많겠네요
유> 네 드로잉 작품이라든지 많은 스케치들 보실 수 있으십니다
지> 그렇군요 이 미술관 설계하시면서도 신경 많이 쓰셨겠는데요
유> 너무 부담이었죠 저는
지> 어떤 테마를 좀 가지고 하신 거죠
유> 아무래도 이타미 준이 미술가이기 때문에 어떤 건축가 유이화의 건축이기보다는 이타미 준 미술관이라고 네이밍을 하고 또 그걸 담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이타미 준의 건축 사상을 의식하면서 설계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가 이타미 준에게 보내는 오마주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타미 준이 항상 의식했던 어떤 자연환경과의 순응이라든지 또 지역성 이런 것들을 의식하면서 설계를 했습니다
지> 네 이제 마지막 질문 드리면서 좀 정리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유동룡 미술관이 앞으로 어떤 공간으로 자리매김 되길 바라시는지 말씀 들으면서 좀 인사드리겠습니다
유> 이타미 준이 늘 이야기했던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문맥 정통성에 기반을 두어야 국제적인 보편성이라든지 현재의 사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런 말을 늘 하셨고요 그러한 작품이어야지만 그 고유한 오리지널리티를 가질 수가 있고 세계적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어떤 이런 어차피 또 여기에 이렇게 이타미 준 뮤지엄을 만들었고 또 늘 그렇게 사랑하시던 제주에 뿌리를 내린 만큼 어떤 제주의 고유성이라든지 가치를 어떤 세계에 연결해서 열매를 맺어나가는 미술관이었으면 합니다
지> 네 2005년에 이제 프랑스 정부가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여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국적을 떠나서 세계적인 예술성을 지닌 예술가다 건축가가 아닌 예술가다 이런 표현을 썼는데 앞으로 이 미술관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그분의 어떤 흔적과 또 그분의 생각들을 읽어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되기를 바라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유> 네 감사합니다
지> 네 유동룡 미술관의 건축가이자 관장을 맡고 있는 유이화 대표와 이야기 나눠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