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문보기 (2019년3월28일~ 2023년7월10일)
3월28일(목) 시사전망대-43 김원봉 특별법(김동현 시사평론가)
■ 방송 : 제주MBC 라디오 <라디오제주시대>
제주시 FM 97.9 서귀포시 FM 97.1 서부지역 FM 106.5 (18:05~19:00)
■ 진행 : 윤상범 아나운서
■ 일시 : 2019년 3월 28일(목)
■ 대담 : 김동현 시사평론가
◇ 인터뷰 전문보기 자료에 대한 저작권은 제주MBC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할 경우, 채널명과 정확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윤상범> 오늘도 김동현 박사께서 스튜디오에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김동현> 네, 안녕하세요?
● 윤> 자, 봄은 왔는데 바야흐로...
○ 김> 네, 그렇지요.
● 윤>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요?
○ 김> 정말 봄이 왔더라고요. 오늘 제가 올 때 제주대학교에서 이 MBC로 왔는데요. 제주대학교 입구 진입로 벚꽃이 참 아름답더라구요.
● 윤> 아, 예 그렇지요.
○ 김> 꽃망울이 좀 피기 시작했더라구요.
● 윤> 뭔가 좀 마음을 자극했던 것 같습니다.
○ 김> 예 그렇습니다. 이번 주말이 절정이 될 것 같은데 제가 이 말씀드리는 이유는 정말 매년 맞는 봄이잖아요? 꽃이 피고 다시 봄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게 당연한 건데 이 당연한 사실들 앞에서 우린 또 4월 맞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4월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이제 다음주면 4.3 71주년 추념식도 있지요. 생각을 해보면 작년 70주년이 정말 엊그제 같다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문재인 대통령이 위령제 참석을 해서 이렇게 연설했죠.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연설했던 것 기억을 하실 텐데 많은 분들이 좀 그 연설을 들으면서 감격하셨다 이렇게 말씀들 하셨거든요.
이유는 여기 있지요.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절에 사실상 역사가 좀 뒷걸음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느끼셨을 텐데 4.3이 좀 잊혀진 것 아니냐 라고 하는 지적들이 있었습니다. 보수 정권들은 4.3을 불편한 역사쯤으로 좀 여겼던... 썼지요. 그리고 기억하시겠지만 지금은 제 1야당이 대표가 되었지만 당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2017년에 4.3 추념식 때 왔었잖아요? 그때 위령제에서 이 황교한 권한대행의 추도사 기억하십니까?
● 윤> 4.3 얘기가 별로 없었던 거 같긴 한데요?
○ 김> 물론 4.3에 대한 이야기도 좀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를 제주의 관광 산업이 다시 도약을 해야 된다 그리고 제 2공항, 신항만 뭐 이런 이야기를 해서... 글쎄요 뭐 이런 얘기들도 때로는 필요 할 수 있겠습니다만 4.3이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리고 4.3으로 인해서 제주도민들이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생각하면 좀 적절치 않았던 것 아니냐라고 하는 의견이 좀 다수를 차지했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라고 했던 작년 2018년 70주년의 문재인 대통령 추도사가 제주도민들 특히 유가족들, 유족들에게 각별하게 다가왔었다 이렇게 볼 수 있을텐데. 그 70주년 추념식에 참석했던 김석범 작가, 화산도 작가죠. 대통령 추도사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 그 장면 보신 분들 많으실 텐데 좀 감격스러웠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제주도에 봄이 오고 있다 생각해보면 제주도만의 봄이 아니라 그해 작년에 보면 남북정상회담도 앞두고 있어서 제주에 시작된 봄이 결국은 한반도의 봄으로 이뤄지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섞였던 이야기가 아니었나 이렇게 회상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윤> 기대감이 섞였던 이라고 말씀하시고 회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아직 그렇게까지 찬란한 봄 날은 오지 않았다. 이런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 김> 네 그렇죠. 그러니까 제가 이 말씀 드린 이유는 그렇게 좀 봄이 되면 이제 한반도에 봄이 오면 지금도 우리가 여전히 말할 수 없었던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있잖아요. 바로 70년 전 수많은 촛불로 타올랐던 사람들을 우리도 이제는 기억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김경훈 시인이 있습니다. 김경훈 시인의 시에 보면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진 것이 억울하다’고 하는 그런 시가 있는데요. 그래서 그 억울함을 좀 풀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기대감도 있었죠. 물론 이제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그 수형인들 있지요. 재심결정이 받아들여졌고 올해입니다. 2019년 1월 무죄나 다름없는 공소기각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아마 이 뉴스들도 많이 보셨을텐데 정말 70년 억울한 누명이 벗어진 순간에 그 고령의 수형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들을 아마 여러분들 지켜보셨을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 윤> 음.. 그 부분을 보면서 많은 분들께서 같이 눈물을 흘리기시도 했고요. 정말 그 70년의 세월이라는게 저희가 헤아릴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죠. 어쨌거나 그분들께서는 그 시간이 굉장히 야속하고 억울한 시간이었겠지만 그래도 지금에 와서 조금이라도 좀 풀리는 그런 후련함은 있으시겠죠?
○ 김> 그렇죠. 생각해보면 70년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을 해보죠. 15살 정도 되는 꽃다운 소녀가 한아이의 엄마가 되고 다시 할머니로 늙어 갔던 세월이 정말 70년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늦게 와 버린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정의가 너무 늦게 와버렸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좀 뒤늦은 정의였지만 그래도 그 정의의 눈물 흘리는 수형인들의 모습은 결국은 4.3의 상처가, 4.3의 아픔이 얼마나 우리 제주도민들, 유족들의 그리고 생존자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지요.
생각해 보면 있죠. 감옥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생존 수형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감옥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오해와 편견들이 정말 덧씌워졌잖아요. 그리고 그 편견에 손가락 총 그야말로 수형인들의 가슴이 수천번 수백번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증언을 하시는데 따지고 보면 1948년 49년 우리가 흔히 이제 무작위 중년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제주섬 전역 정말 초토화 됐던 그 학살 현장 기억하실 텐데 그야말로 빨갱이, 빨갱이 가족이라고 누군가 손가락질만 하기만 하더라도 정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던 우리 그런 엄혹한 시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 특히 제주 사람들에게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운건 힘을 가진 자들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 아마 삼광삼진이라고 여러분들 들어보셨을 텐데 쏴 죽이고, 태워 죽이고, 찢어죽이는 정말 공공연한 학살의 주역이 바로 이들이었지요. 우리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권력의 핵심.
어떤 측면에서 본다고 한다면 이런 학살의 방법과 기억을 좀 공유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제주사람들을 빨갱이라고 했듯이 그 엄혹했던 군부독재시절 학생을, 순박한 어부를, 고국으로 돌아가 공부하던 재일교포를 간첩이라고 지목했던 적이 있잖아요. 영장 없이 체포도 하고, 고문도 하고 구금해 넣고 기억하시겠지만 민청학련사건이 그랬구요. 사법살인이라고 불렸던 인혁당사건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좀 불편한 역사지만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아무나 빨갱이라고 손가락 총으로 잡아 죽이는 학살의 유전자 이게 대한민국 권력자들의 민낯이 아닌가 싶습니다.
얼마 전에 전두환씨가 광주 법정에 섰지만 결국 그 법정에 서는 순간까지 단 한마디도 사과와 사죄를 하지 않고 기억하시죠? “이거 왜 이래!” 라고 하는 말을 했죠? 결국 그 권력자들의 민낯들이 결국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 윤> 민주주의 아버지께서 사과를 할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만은...
○ 김> 네, 그렇습니다.
● 윤> 자 어쨌거나 여태까지 그 세월호에 대해서 쭉 얘기를 하셨습니다만은 이게 굉장히 오래된 얘기가 사실은 아니에요. 가장 최근까지도 있었고, 여전히 지금도 우리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이데올로기 문제, 그다음에 아까 얘기했던 사실 저는 이름도 섬뜩합니다만 이 빨갱이라는 단어 자체가 금기어가 금기어처럼 되고 있지만은 아직도 그 존재 자체는 남아 있단 말이죠.
○ 김> 그렇지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이런겁니다. 지금 4.3의 문제를 제주 지역에 문제로만 좀 생각하기가 어렵다는거죠. 그러니까 제주에서 봄이 오고 있으면 그 제주의 봄이 한반도의 봄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제주에 우리는 완연한 봄이 왔다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겨울이 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약산 김원봉 선생을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기억하시죠?
● 윤> 김원봉선생님이라고 하면 밀정에 소개가 되면서 많이 알려지게 되었지요?
○ 김> 네네. 영화 배우 조승우 씨가 약산 김원봉 선생님을 연기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요. 이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 이렇습니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약산 김원봉에서 김원봉 선생의 독립 유공자 서훈수여 가능성을 언급 하니까 약산 김원봉 선생을 반 대한민국 북한 공산주의자다 이렇게 말한건데요. 그래서 약산 김원봉 선생하면 식민지시절에 의열단을 조직했던 이력이 있고요. 항일투쟁을 지휘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잖아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도 지냈고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의 마지막 국무위원을 지낸 분이기도 한데 일본 제국주의가 정말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고 했던 제일급 수배범 바로 약산 김원봉 선생님입니다.
아마 유명한 일화가 있을텐데요. 해방 후에 약산 선생이 대표적인 친일파인 노독솔이라는 경찰에게 잡혀서 심문을 당하면서 따귀를 맞았다라는 일화가 유명 할 텐데요. 따귀를 맞고 나서 이랬다는거 아니겠습니까? 일본에게도 일본 순사에게도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았는데 해방된 나라에서 친일경찰 출신에게 따귀를 맞아서 정말 억울하고 분하다고 하니까. 나경원 원내대표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다라고 약산 김원봉 선생을 얘기했지만 북한에 남아 있게 된 이유는 따지고 보면 해방 이후에 대한친일파들이 활개를 치던 현실 그것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해석인데, 이런 해석에 비춰 본다면 좀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 윤> 사실 약산선생님께서 남북협상의 남측대표로 북한에 갔다가 거기서 남으신거잖아요? 남은 이후의 삶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만은. 자 그런데 이 김원봉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사실 아직도 분분합니다. 역시나 이것도 정치적 이데올로기 문제가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는 거잖아요.
○ 김> 예, 그러니까 제1야당의 원내대표가 약산 김원봉 선생을 공산주의다라고 비판한 건데요. 이 말이 있기 전에 얼마 전에는 해방 후의 반민특위로 국민이 분열했다. 이런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잖아요? 나중에는 반민특위가 아니라 반문특위였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국민들 국어 실력을 좀 탓하긴 했는데 이런 얘기들을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납니다.
한 10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2007년 기억하시죠? 당시 새누리당 나경원 대변인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BBK를 설립했다 그 동영상 그때 한참 뉴스에 초점이 됐었던 적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얘기했죠. “BBK를 설립했다고만 했지 내가 설립했다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이야기를 남깁니다.
●윤, 김> “주어가 없다.”
○ 김> 이런거 보면 국민들 국어실력 탓하는 건 나경원 원내대표의 오래된 습관처럼 보이는데 제가 이제 이런 나경원 원내대표의 이야기를 꺼낸 건 반민특위나 김원봉 선생에 대한 비판의 맥락이 따져보면 공산주의자는 용납할 수 없다란 인식이 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 윤> 독립운동가일지언정...
○ 김> 네, 그렇지요 이러한 논리라면 식민지 시절에 일본 제국주의의 저항하기 위해서 사회주의를 택했던 수많은 항일운동가가 있잖아요. 거기에는 제주의 청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정말 잊혀진 역사가 되고 마는데 어떻게 보면 식민지 시절에 조국 독립을 염원했던 수많은 운동가들에게 이념라고 하는 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는데 그 시절에 대한 이해 없이 현재의 잣대로 그들을 재단하는 건 좀 또 하나의 한 번의 낙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 윤> 예, 김일성까지도 소원할것이냐 이런 이야기까지도 나온다면서요? 이런 얘기들까지 하면 얘기가 산으로 갈 것 같아서 이건 좀 정리하도록 하고 자 그런데 이제 우리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로 분류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그동안 언급하는거 조차 금기시 되어 왔었고 그분들에 대한 업적에 대해서도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 김> 제가 따져 보니까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기 시작한게 언제냐면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의 자유한국당의 전신이잖아요. 민주자유당 민자당 정권이 먼저 시작한 일입니다.
그런데 또다시 공산주의자다 이렇게 발끈하고 있는데 제가 이 발언을 보면서 마치 70년 전 제주에서 빨갱이라고 하는 이유로 그러니까 빨갱이들은 박멸해야 된다, 섬멸해야 된다라고 하면서 손가락질로 사형선고를 내렸더니 이게 지금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반복되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요.
왜냐하면 제 1야당이 원내대표 역사인식에 대해서 당 내에서 비판 여론보다 옹호하는 여론이 굉장히 높다는거지요. 결국 이제 우리가 봄이 왔다라고 생각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봄옷을 꺼내 입고 있는데 제 1야당만은 두터운 겨울파카를 입고 있는 것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을 “북한 김정은의 수석대변인” 이렇게 공격하는게 최고의 한수다 이렇게 생각하는 야당이니 그럴 법도 하겠습니다만은 이런 식의 발언들은 결국 우리 4.3이라고 하는 해방공간에서 벌어졌던 이데올로기적 대립, 그리고 이데올로기 잣대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숨죽였던 그 역사를 다시금 70년이 지난 지금도 되풀이 하려고 하는 시도가 아니냐라고 하는 우려를 낳게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 윤> 제가 아까 21세기 얘기를 했었는데 지금 이런 논란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 아직도 우리사회가 그 당시 일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이유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 김> 네 그렇죠. 제가 뭐 이 얘기하면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럽에 대한 사례를 좀 조사 했는데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럽사회는 독일의 대해서 막대한 경제적 피해배상 요구하는게...
● 윤> 전쟁배상금을 물렸었죠?
○ 김> 당연시 됐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영국의 재무공무원 자격으로 참석했던 케인스라고 하는 경제학자 있는데 그런 의견에 반대를 합니다. 왜냐면 독일도 함께 살아야 된다. 그래야 이런 보복의 역사를 끝내야 또 다른 전쟁은 다시는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소신을 밝히게 되는데 그런 소신을 발표한 것을 책으로도 내게 되거든요. 그렇지만 결국 케인스와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은 소수였고 결국은 유럽은 다시 2차 세계대전의 비극에 쌓이게 되잖아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이 끊임없는 적대, 끊임없는 손가락질, 끊임없는 이데올로기는 끊임없는 대결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끊임없는 대결과 대립에 이데올로기를 계속해서 산다는 건 결국은 우리가 학살의 DNA를 멈추지 않겠다는 그런 선언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그렇다고 한다면 결국 그 피해는 그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해방공간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입었던 제주의 사람들 그리고 4.3유족들은 또 다른 상처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 윤> 예, 사실 그렇게 때문에 4.3을 우리가 이야기할 때 항상 화해와 상생을 이야기 하는 부분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도 우리가 다른 나라들이긴 합니다만 역사 속에서 그 교훈을 찾아야 된다는 말씀이신데 글쎄요. 근데 지금 우리사회는 계속해서 지금도 흑백논리가 나눠져서 양극으로 좀 싸우고 있는 것들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 김> 네, 그렇죠. 공산주의자라고 하는게 지금 굉장히 금기처럼 되어 있잖아요. 근데 생각해보면 4.3 진상규명 역사라고 하는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벗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냐면 반공 이게 그 자체가 하나의 진리였던 시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 윤> 그렇죠.
○ 김> 그렇기 때문에 빨리 이런 낙인은 정말 천언 같은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런 낙인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4.3 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된게 아니겠습니까? 역사가 이만큼 온 거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여전히 말할 수 없는게 있다 그러면 그 말할 수 없는 금기를 이제는 넘어설 때가 되지 않느냐 71년인데 언제까지 우리가 이 금기를 금기로 여겨야만 되는가? 라는 질문을 좀 던져 봐야 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 윤> 아까 저희가 장성철 바른미래당 도당위원장과도 이야기를 나누어봤습니다만 4.3특별법과 관련돼서 지금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가 있지만 이것도 아직 해결이 안 되고 있어요.
○ 김> 그렇죠. 그러니까 4.3특별법 개정안이 해결이 되지 않는 이유도 아까 말씀해 드렸지만 제 1야당 원내대표가 공산주의자라고만 하는 공산주의자라는 단어 그 자체 정말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어찌보면 4.3특별법 개정안이 처리가 늦춰지고 있는 한 이유가 아닌가 싶은데. 이런 식으로 자꾸 4.3을 접하게 된다고 한다면 4.3이라고 하는 이 역사적 진실이 뒷걸음 칠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회가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그거는 뭐 우리 도민들도 바라지 않을 거고, 제 1야당도 바라진 않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이런 공산주의자, 금기 이런 것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 뭐 이런 과민반응을 좀 버려야 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 윤> 자, 오늘 이야기 마무리는 이걸로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방송 들어오기 전에 4.3 특별법 2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잖아요?
○ 김> 네, 그렇지요. 4.3특별법 2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3특별법에는 희생자라 하면 제주 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 된 사람, 후유장해가 남은 사람 또는 수형자로서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토벌에 주역했던 군인과 경찰들도 4.3 희생자 되는데 지금 희생자로 되지 못하는 사람들 흔히 말하는 불량위패라고 공격받는 사람들 그리고 2001년 이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로 자진철회됐던, 자진철회했던 10명의 사람들 아직 그 위패조차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거든요. 71주년이 됐지만 아직도 그들의 영혼은 그 위령날에 초대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들의 영혼까지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윤> 예, 알겠습니다. 사실 작년에 4.3 70주년을 맞으면서 그렇게 고대하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방문을 하면서 많은 분들께서 4.3 앞에는 이제 꽃길만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아직도 우리 앞에는 숙제가 많이 남아있다라는 것 다시 한번 기억을 했으면 좋겠구요. 4.3 71주년이 다가옵니다. 더 많은 활발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4.3 71주년 때 현장 방문 하실 거죠?
○ 김> 네, 가서 위령제 참석해야 되고요 매년 하는 일이니까요.
● 윤> 사실 저희랑 그때 또 방송을 하셔야 될 수도 있습니다.
○ 김> 아, 그렇습니까? 제발.
● 윤> 아, 초대하면 바로 오시는 걸로 저희가 알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자, 시사전망대 시간 오늘도 김동현 박사와 함께 했습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 김> 네, 감사합니다.
◇ 인터뷰 전문보기 자료에 대한 저작권은 제주MBC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할 경우, 채널명과 정확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