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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 05분

인터뷰 전문보기 (2019년3월28일~ 2023년7월10일)

10월 28일(수) [초대석] 70평생 서귀포에서 시 쓰며 10년간 온갖 일로 모은 5천만원을 서귀포여중에 기부한 이유순 시인을 만나봅니다

■ 방송 : 제주MBC 라디오 <라디오제주시대>

         제주시 FM 97.9 서귀포시 FM 97.1 서부지역 FM 106.5 (18:05~19:00)

■ 진행 : 지건보 아나운서

■ 일시 : 2020년 10월 28일(수)

■ 대담 : 이유순 시인

◇ 인터뷰 전문보기 자료에 대한 저작권은 제주MBC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할 경우, 채널명과 정확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성산포 파도>

                                  이유순

울고 싶도록 푸르른

날개짓에 휘파람

용궁 속 어머니 손짓이었나

천년을 입고도 변하지 않은

눈부신 화관을 쓴 웨딩드레스

부딪치고 부서지는 목마른 애원

섭지코지 외돌바위 가슴자락을

얼마나 고백해야 파도가 될까

올레길 따라 걷던 아픈 나그네

숙부쟁이 한아름 머리에 이어

포말지는 이 그리움 딛고

왔던 길 되돌아 갈 줄을 몰라

나도

너처럼 소용돌이 쳐본다.

●지건보> 방금 들려드린 시는 이유순 시인의 <성산포 파도>라는 시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눠볼 분이기도 한데요. 지금 전화 연결이 돼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유순> 안녕하십니까?

●지> 네. 반갑습니다. 앞서서 저희가 직접 낭송해 주신 <성산포 파도>라는 시를 들어봤는데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책에서 ‘제주올레 마마’라고 이렇게 별명까지 붙여 주실 정도로 친분도 있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유순 시인을 잠시 제가 소개해 드린다면 서귀포가 원래 이제 고향이시고 70 평생 서귀포를 사랑하면서 홀로 살아오신 향토 시인이신데 저희가 시를 먼저 소개를 해드렸잖아요. 근데 시는 언제부터 쓰신 건가요?

○이> 시는 제가 글짓기 소질은 초등학교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삶이 굴곡져서 제가 39에서 40살 되는 해에 서귀포에서 민속주점을 했습니다. 찹쌀로 직접 밥을 찌고 보리쌀 갖다가 찌고 이제 누룩하고 배합시켜서 제가 직접 민속주를 만들었거든요.

●지> 그래서 별명 중에 민속주점 노처녀라는 별명이 있었군요?

○이> 예. 그런데 그 노처녀라고 별명을 붙이신 분이 아주 유명한 강문신 씨라고 동아일보하고 서울 신춘문예, 양쪽의 신춘문예 당선되신 분이에요. 아주 똑똑하구요. 근데 그분이 자꾸 우리 집에 막걸리 마시러 와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가는 듯이 가는 나그네’ 하고 줄줄줄 읊길래 ‘여보시오. 당신 한번 시인 돼 보실래요?’ 그래서 서귀포문학 창간 멤버를 만들어요.

●지> 그렇게 해서 권유받고 등단하신 거예요?

○이> 그분을 내가 먼저 신춘문예 타게 아주 고정국 시인, 고 김종두 시인, 한기팔, 기타 등등을 우리 집 민속 집에서 발상된 게 서귀포문학 창간호가 서귀포 민속주점에서 그거 시작한 거예요. 제가.

●지> 그렇군요.

○이> 그랬습니다.

●지> 저도 찾아보니까 그게 1989년이더라구요. 그래서 서귀포문학 창간호로 등단하셨는데 그때 등단하신 시가 ‘어머니 생각’이라는 제목의 시더라구요. 시로 등단하신 때가 40대에 하셨다고 하셨잖아요.

○이> 예.

●지> 어릴 때 글 쓰는 재주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아까 권유 받으신 것도 있지만 평상시에도 그 때 당시에 시를 써보신 적은 있었던 건가요?

○이> 썼죠. 밤바다 썼죠. 막걸리 한잔 먹고 와서 잠이 안 들면 그냥 낙서처럼 쓰기도 했고 그거는 한 30살. 29살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30살 혼자 살게 됩니다. 어머니랑 딱 둘이만 살다가 어머니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렇게 막걸리만 보면 어머니 젖줄 같고 그래서 결국은 막걸리 장사를 했어요. 제가.

●지> 오랫동안 하셨나요? 민속 주점을.

○이> 아니요. 열 달을 했어요. 왜냐하면은 너무 좋아해서. 술집 주인은 술을 먹으면 안 돼요. 그냥 돈 생각해서도 먹고 좋아서도 먹고 그리 먹다가 제가 간이 나빠 버렸어요. 간이 나빠서 치료받고 한동안 있다가 그 다음에 서귀포문학은 계속 이어져 나가지만 제가 막걸리 집을 팔고, 더 하다가 죽을 거 같아서 팔고 그 돈으로 내가 평생에 어머니한테 불효자라, 시집도 못 간 불효자라, 불효녀라 성요셉 지금 양로원이죠? 요양원인가 양로원 거기에 40살 때에 막걸리 집 판 돈 10%를, 200만원, 200만원이면 그게 10개월 정도 되는 돈을 제가 그 양로원에 기부합니다. 어머니한테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 그러셨군요. 앞서서도 지난 삶이 녹록치 않았다는 얘기를 해주셨는데 그런데 왜 한 때 얼굴 없는 시인으로 통했던 박노해 시인처럼 시집이 없는 시인이라고 들었거든요. 시를 많이 쓰시는데 개인 시집을 따로 내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이> 예.

●지> 그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이> 예.

●지> 어떤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이> 남들 다하는 시집 그게 뭐 대수입니까? 하면 좋지만은 그런 여건도 안 되고 실력도 안 되고 나는 오로지 일념 하나, 나는 이렇게 해야 한다. 막걸리를 참 오랫동안 제가 좋아하고 마셨지만 그럴 때는 이제 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그렇게, 저렇게는 하지만은 굳이 그걸. 중국의 어느 황제는 시 한편만 써놓고도 시인이잖아요.

●지> 그렇기는 하죠.

○이> 그래서 내가 뭐 건방진 소리가 아니고 그냥 제가 그렇게 후배들이 하세요. 하세요. 하지만은 아직은 아니라, 내가 아직 그 시에 대해서는 익은 사과처럼 맛이 없기 때문에 나는 좀 있다가 생각해보고 하고 그렇게 밀려놓았습니다만은 이제 모르겠어요. 내가 얼마까지 살지 모르지만은 일본의 아흔 몇 살의 시인(99살의 시바타 도요)이 된 시집 <약해지지마>.

●지> 늦게 시인에 등단하신 분요?

○이> 네. 그런 사람 존경해 내가 그렇게 한번 돼 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만은 꿈이거든요.

●지> 사실 오늘은 시에 대한 이야기로 저희가 시작을 했습니다만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지난 10년 동안 이렇게 시를 쓰시면서 또 온갖 일을 하면서 모은 재산을 또 모교에 기부를 하셨다는 뉴스가 소개가 되기도 했는데 근데 또 이게 심지어 이번이 처음이 아니시라고 들었거든요. 최근에 서귀포여중에 5천만 원이라는 돈을 기부하셨더라구요. 이 돈은 어떻게 해서 마련하신 건가요?

○이> 그거는 제가 한 때는 삶이 어려워서 막 무작정 살았던 적이 있어요. 술, 담배 많이 하고 저 여자 좀 이상하다 할 정도로 비난의 대상자도 됐고 참 그렇게 살았지만 어느 날 내가 이렇게 살아서, 끝까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그 순간의 찰나에요. 학생들 보면 저는 가족이 없기 때문에, 결혼을 못해서 가족이 없기 때문에 지금도 남의 아이들이라도 다 좋아하고 그렇게 좋은데 교복 입고 다니는 중학생들 보기만 하면 미치는 거예요. 아주, 그냥 말하고 싶고 ‘너 어느 학교니?’, ‘서귀포 여중입니다.’ ‘야, 나 선배야.’

●지> 3회 졸업생이시죠?

○이> 예. ‘나 선배야.’, ‘아, 할머니 맞아?’ ‘맞아. 그래 나 3회. 언젠간 꼭 돌아올 거야.’ 무언의 약속은 했지만 그게 26일 날 실행이 된 건데요. 부끄럽습니다. 난 이렇게 홍보될 줄은 몰랐어요. 진짜. 그냥 말없이 그렇게, 부끄러워서요. 돈이 작아서. 왜냐하면 어느 우리 후배가 언니, 우리 남편이 생일 선물로 6천만 원짜리 자가용 하나 사줬다. 봐라. 그렇게 얘기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작아지는지. 나는 평생 살아도 이 5천만 원인데 정말 나 속상했어요. 5천만 원 미안했고 더 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약속했던 거라 26일 날 제가 그 약속을 지켰어요. 저하고의 약속.

●지> 네. 앞서서 제가 이번 기부가 처음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2010년에도 이 선생님께서 다니시던 신성여고에서 성물 구한다는 소식 듣고 또 1,300만원 기부하셨다는 얘기도 들었고 또 2년마다 국민연금 모아서 학생들을 위해서 또 책도 대략 한 4천권이 넘는 책을 전달하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것들이 굉장히 인생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듣는 저희로서는 참 의미가 큰데 사실 5천만 원이라는 돈, 최근에 이제 기부하셨지만 지금도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계신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이> 지금은 작년까지 서귀진성이라고 있어요.

●지> 네. 알죠.

○이> 성산 저기 가면 서귀진성에 초창기 2013년도에 거기 형성이 됐거든요. 복원. 그런데 이제 2013년부터 제가 늦게 12월 달에 거기 취직이 되어서 작년에 그만뒀어요. 만 6년, 만 6년하고 그 다음에 서귀포여자중학교 약속 때문에 돈이 좀 모자라서 상당히 조마조마 했어요. 그래서 천지동 동사무소에 가서 매달렸죠. 매달렸다고. ‘저 일자리 주십시오. 일자리 주십시오.’ 그런 말들은 못하고 ‘내 뭐 할 거니까.’ 이렇게 하겠다는 말은 못하고 ‘일자리 주십시오, 일자리 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그렇게 애걸을 하니 그전에 제가 공공근로 일할 때마다 일을 아낌없이 잘하니까 그 담당직원이 저를 잘 기억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여러 사람 모집에서 제가 됐어요. 그게 아, 좋은 일을 하려니까 이렇게 돕는구나 생각하고 열심히 했죠. 그래서 이제 약속대로 2020년 10월 26날은 일한 날짜는 한 3년 전부터 모았던 돈을 내가 2020년도에 돈을 이렇게 모아야 한다는 그 목표를 가지고 10월 26일 한다고 못 박아 놓고 부지런히 하는 거예요.

●지> 그러셨군요.

○이> 안 그랬으면 내가 클린 하우스, 배출 도우미 못했으면 아마 내년으로 갔을지도 몰라요.

●지> 그러니까 지금 클린하우스 지킴이도 하시고 예전에는 한 6년 동안 서귀진성에서 또 일도 하시고 동사무소 공공근로도 하시고 그랬던 거네요. 지금도 그러면 일을 하고 계신 거죠?

○이> 해야죠.

●지> 예. 지금도 그럼 클린하우스에서 일을 하고 계신건가요?

○이> 예. 저희들은 12월 10날로 끝납니다.

●지> 어떠세요? 이렇게 사실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굉장히 각별하신 거 같고 또 어떻게 보면은 퍼주는 거를 굉장히 좀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분은 그런 얘기도 하시더라구요. 이유순 할머님 시인 두고서, “퍼주면서 가난했던 게 아니라 가난해도 퍼주는 즐거움을 아는 분이다”. 이런 얘기까지 하시던데.

○이> 아이구, 그래요?

●지> 네. 사실 넉넉하지 않은 삶이실텐데도 이렇게 후배들을 위해서 또 지역 사회를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느끼시는 그런 어떤 보람이나 이런 것들이 크신 것 같아요.

○이> 그렇기도 하구요. 제가 너무 가정이 불우해서 힘들게 살아왔던 게 그게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말 한마디들이, 상처를 줬던 그 사람들이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들이 스승이에요. 그래서 지금 그 사람들 고마워요. 나를 그렇게 슬프고 울게 했지마는 나 혼자 ‘아! 난 이렇게 해야지. 왜 저 사람들이 저런 얘기를 했을까? 난 꼭 저 사람들의 그 이야기를 뒤집어 놓으리라. 언젠가는 아, 저 사람은 그렇게 보였던 사람만은 아니었구나.’ 그걸 또 그렇게 하고 싶었고 또 나이도 들었잖아요. 그리고 또 이제 워낙 서귀포여중 3학년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못가서 부산가서 식모살이 이런 거 저런 거 뭐 고등학교 서귀포여자고등학교 1학년 했을 때에 그 아이들의 시선과 교복을 준비하지 못해서 살았기 때문에 또 선생님들 많이 사랑해주시긴 했지만 그게 그때 당시는 서럽고 아팠어요.

●지> 저희가 말씀 듣다 보니까 진짜 한편의 인생극장을 보는 듯한 파란만장하게 굉장히 또 힘든 시간을 잘 보내오신 그런 과정들이 눈에 선하게 보일 정도인데요. 시집으로 저희가 시작을 했는데 시집을 앞으로도 그러면 낼 계획은 없으신 건가요?

○이> 그런데 뭐 딱 그렇게는 말 못하겠지만 어느 때가 되면 또 나도 이제 인생의 종지부를 이제 뭔가 흔적 하나 정도는 그런 생각도 하지만 모르겠어요. 시집을 내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못한 거는 오로지 이놈의 5천만 원.

●지> 돈을 또 모아야 되니까.

○이> 예. 돈, 돈, 돈. 이 거지 발싸개 같은 돈. 그 돈 때문에 시가 안 나와요. 시가 안 나와.

●지> 누가 옆에서 시집 낼 수 있게 좀 이렇게 도움을 주시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좀 드네요. 말씀 듣다보니까.

○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지> 네. 오늘 말씀 아쉽지만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전화 연결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아나운서님.

●지> 네.

○이> 코로나 조심하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지> 네. 이유순 할머님도 건강 조심하시구요.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이> 예. 감사합니다.

●지> 네. 고맙습니다.

○이> 예.

●지> 이유순 시인과 얘기 나눠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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