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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뉴스줌인

40년 전 그 날, 나는 광주의 시민군이었다

◀ANC▶

우리나라 현대사와 민주주의 발전에
큰 획을 그었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았는데요,

당시 제주 출신으로 5.18에 참여했던
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을
뉴스줌인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END▶
◀VCR▶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계엄군의 첫번째 발포>>

오용태 ◀INT▶
"갑자기 총을 쏘기 시작하더라고요. 계엄군에서 버스를 향해서 총을 갈기니까 총 맞은 사람들이 비틀거리면서 내려오더라고 그래서 뛰어나가서 한 사람을 부축해서 돌아서 나오는데 갑자기 총질을 해서 다리를 뒤에서 맞은 거죠."

"설마 나는 쏠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아무리 적군도 아니고 같은 나라 백성들인데 설마 총 맞은 사람 살릴려고 오는 그 사람을 총으로 쏠거라고 선생님은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계엄군의 마지막 진압작전>>

진희종
◀INT▶
"이제 계엄군이 들어오기로 했다. 나갈 사람은 나가라. 남을 사람은 가족들에게 유서를 써야 한다고 하니까 남은 사람들은 유서를 쓰고 남은 거죠, 그런데, 거의 안 나가더라고요.

"회피하는게 상당히 부담스러웠어요. 거기 있는 구성원이나 저나. 이 부당한 상황에 굴복하는 게 양심에 꺼리지 않겠냐는게 강하게 끌린 거죠."

<<한 쪽 다리를 잃은 뒤
건설업체 대표가 된 오용태 씨>>

오용태
◀INT▶
"후회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보다도
다리 하나가 없으니까 없는 상태에서 생존해야되겠다. 어떻게 생존해야 될 거냐. 그런 고민들을 많이 한거죠."

<<1987년 6월 항쟁
국토 최남단 서귀포 시위를 이끈 진희종 씨>>

진희종
◀INT▶
"전두환 정권이 그때까지 이어지고 재집권의 의도를 갖게 되니까 전국적으로 민주항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서귀포는 대학도 없는 곳인데 서귀포에서조차 일반 청년들이나 시민들이
현 정권에 저항을 하면 전국이 일반화되는
상징적인 의미가 되지 않겠느냐."

<<5.18 40주년, 우리에게 남긴 의미는? >>


오용태 ◀INT▶
"눈에 보이는 것을 피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진실을 보면서도 부정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이 길로 가는 것이 진실이고 진리인데. 이 길로
가면 부딪치고 분쟁이 일어나고 불편해서 안 가겠다고 하면 역사는 뒤로 뒤로 밀린다는 거에요."

진희종 ◀INT▶
"진짜 주인공은 이름없는 보통 백성들이라고 봐요. 촛불집회 때 나오고 5.18 집회할때 나온 그 분들의 힘이 근본적인 힘이라고 보고. 거기에 참여했다고 하는 사람만이 주인공이 아니지 않느냐. 결국 다수의 국민의 보편적인 상식, 성숙한 시민의식이 5.18 정신의 가장 큰 에너지라고 봅니다."
조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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