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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1947년① '3.1절 발포 사건'

◀ANC▶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대가
경찰 지서와 우익단체를 습격하며
무장 봉기를 일으킨 날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 보수단체들이
제주 4.3을 무장 폭동이라며
이념 논쟁을 일삼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4.3수형인들의 당시 판결문을 통해,
군경의 탄압 등으로
저항에 나설 수밖에 없던 제주상황을 조명하는
기획 뉴스를 마련했습니다.

'1947년 무슨 일이 있었나',
오늘은 첫 순서로 4.3의 도화선이 됐던
3.1절 기념대회를 살펴봤습니다.

김찬년 기자입니다.

◀END▶
◀VCR▶

(S/U) "1945년 해방 직후
제주도는 다른지역과 달리
항일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인민위원회가
도민들의 신뢰를 받으며,
미군정과 큰 충돌 없이
도내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주도했는데요.

4.3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절 기념대회도
제주도 전역에서
축제 같은 분위기로 진행된 사실이
판결문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CG1)
"1947년 4월 3.1절 기념대회 주최자로
징역 8개월의 선고를 받은 장진봉씨의 판결문.

안덕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대회가 열렸고,
면민 천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행사 후에는
씨름대회가 열릴 정도로
평화적인 기념대회였고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CG2)
"징역 6개월을 받은
박남섭씨의 판결문에서도
이같은 분위기가 다른 지역에서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림국민학교에 면민 6천여 명이 모여
기념대회를 치르고,
한림리에서 옹포리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습니다."

◀INT▶박용현/박남섭 수형인 조카
"6천 명 정도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독립과 해방의 목마름이 있었고, 그걸 기념하고 표출하는 행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림 같은 경우는 상당히 (기념대회가) 평화적으로 마무리됐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습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1947년 3.1절 기념대회는
성산과 우도 등 11개 지역에서 열렸고,
당시 제주 인구의 17%인
3만 5천에서 5만 명이 참석할 정도로
주민들의 참여 의지가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4.3의 도화선이 된
북국민학교 기념대회만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아이가 기마대에 치여
주민들이 항의하자,
경찰관이 총을 쏴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CG, 한성일보 담화문)
"도민들은 경찰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당시 최고 책임자였던 조경옥 경무부장은
군중이 집단적 충돌에 가담해 폭행을 했다며
불가피한 발포라는 담화문을 발표해
들끓는 민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INT▶박찬식/전 제주4·3연구소장
"제주도 3·1사건에서는 6명의 주민이 죽었는데도 바로 폭력적인 대응을 당시 제주도 주민들은 하지 않았습니다. 6명에 대해 미 군정 당국이 사과 표명도 없이 가니까 3·10총파업이 전개되잖아요. 3·10총파업은 당시 6명 죽음에 대한 즉각적인 폭력 대응이 아니고 평화적인 투쟁 방식이라고 보입니다."

하지만 미군정은
남로당이 북조선과 모의했다며
제주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며
이념의 프레임을 씌웠고,
다른지역 응원경찰 300여 명까지
제주로 보내 총파업에 강경대응하면서,
주민들과 군경의 충돌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됐습니다."

MBC뉴스 김찬년입니다.
김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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